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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양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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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양읍(鳳陽邑)

【읍】제천시 행정 구역 1읍 7면 9동의 하나. 본래 제천군의 지역으로서, 제천에서 서울로 가는 옛 관행길의 오른쪽이 되므로 근우면(近右面)이라 하여, 천남(泉南), 신리(新里), 장평(長平), 묵계(墨溪), 소사(所沙), 옹당(翁堂), 명도(明道), 사당(沙堂), 고산(孤山), 주포(酒浦), 팔송(八松), 주론(舟論), 노목(老木), 산척(山尺), 광암(廣岩), 직티(稷峙), 의 16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그 뒤 사리곡(沙里谷), 고지동(古之洞), 한의동(閒儀洞), 대미론(大美論), 도매(道?), 횡티(橫峙), 학전(鶴田), 옥전(玉田), 동점(銅店), 구학(九鶴), 외소(外少), 내소(內少), 오산(梧山), 의 13개 동리를 더 두어 29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근우면(近右面)에 현우면(縣右面)의 하소리(下所里)의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장평(長坪), 신리(新里), 천남(泉南), 왕암(旺岩), 미당(美堂), 명도(明道), 명암(明岩), 학산(鶴山), 옥전(玉田), 구학(九鶴), 팔송(八松), 봉양(鳳陽), 주포(周浦)의 13개리로 개편 관할하였는데, 1920년 9월의 행정 구역 변경에 의하여 근좌면(近左面)의 연박(硯朴), 원박(院朴), 공전(公田), 구곡(九谷), 마곡(馬谷), 삼거(三巨), 의 6개리를 병합하여 봉양리(鳳陽里)의 이름을 따서 봉양면(鳳陽面),으로 고쳐서 19개리를 관할하다가, 1980년 제천시(堤川市)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堤原郡) 봉양면(鳳陽面)이 되었다. 1983년 2월 15일 신리 왕암리 천남리 3개리를 제천시에 넘기고 16개리를 관할함.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읍으로 승격하여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으로 됨. 동쪽은 용두동(龍頭洞), 청전동(靑田洞), 화산동(花山洞), 서쪽은 백운면(白雲面), 남쪽은 금성면(錦城面) 청풍면(淸風面), 북쪽은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신림면(神林面)에 닿음.

공전리(公田里)

[공전]【리】본래 제천군 근좌면(近左面)의 지역으로서, 국유의 논밭이 있었으므로 공전(公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소시랑리(小侍郞里)와 장담리(長潭里)를 병합하여 공전리라 해서 1920년 봉양면에 편입됨. 1980년 제천시 시승격으로 인하여 제원군(堤原郡) 봉양면(鳳陽面) 공전리(公田里)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공전리(公田里)가 됨. 고서방-소【소】장담 밑에 있는 소. 공전(公田)【마을】→ 공전리. 전-역(公田驛)【역】공전 북쪽에 있는 충북선의 기차역. 1959년 개통에 따라 세움. 공전사-터(公田寺-)【터】절텃골에 있는 공전사의 터. 삼층 돌탑과 미륵불이 있음. 구런-뜰【들】만금잇들 앞 구렁에 있는 들. 글안장-터【터】공전리에 있는 장터. 고려 고종(高宗) 6년(1219) 때 고려에 침입하였다가 사로잡힌 몽고의 포로병들이 와서 살았다 함. 만금잇-들【들】뱀고개 너머에 있는 들. 땅이 좋아서 농사가 잘 되므로 만금(萬金)의 가치가 있다 함. 밋밋-재【고개】장담에서 구곡리로 가는 밋밋한 고개. 뱀-고개【고개】원공전에서 공전역으로 가는 꾸불꾸불한 고개. 사대-동(寺垈洞)【마을】→ 절텃골. 소시랑-리(小侍郞里)【마을】→ 소시랑이. 소시랑이[소시랑리]【마을】공전 서북쪽에 있는 마을. 시랑(侍郞)벼슬을 한 소씨가 살았다 함. 식-개[식포]【마을】장담 서쪽에 있는 마을. 임진왜란 때 군인들이 앞 냇물 가에서 식사를 하였다 함. 식-포(食浦)【마을】→ 식개. 오얏-골【골】원공전 서쪽에 있는 골짜기. 우아정-터(雨我亭-)【터】원공전에 있는 우아정의 터. 1878년 이 석조(李錫兆)가 건립하여 ‘우아공전 수급아사(雨我公田 遂及我私)’라는 옛 글귀를 따서 우아정이라 함. 원-공전(元公田)【마을】 공전리의 원 이름. 자당-산(紫堂山) 【산】→ 잔달미. 자양-서사(紫陽書社)【고적】장담, 공전리 414번지에 있는 서당. 조선 고종(高宗) 26년(1889)에 성리학자 성재(省齋), 유 중교(柳重敎)가 이 곳에 살면서 서당을 세우고 창주정사(滄洲精舍)라 하였다가, 그 후 자양서사로 고쳐 후진들을 양성하였슴. 그의 당질 의암(毅庵) 유인석(柳寅錫)이 의병 창의(倡義)의 비밀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함. 자양-영당(紫陽影堂)【사당】장담 서쪽에 있는 영당. 1906년에 세워 주자(朱子)와 우암(尤庵) 송시렬(宋時烈),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성재(省齋) 유 중교(柳重敎), 의암(毅庵) 유인석(柳寅錫), 습재(習齋) 이직신(李直愼)의 영정을 모시고 해마다 3월 20일과 9월 20일에 제사를 지냄.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지방기념물 제37호 지정 잔달-미[자당산] 【산】장담 앞에 있는 산. 장-담¹(長潭)【마을】공전 남쪽에 있는 마을. 의암(毅庵) 유인석(柳寅錫)이 갑오경장 이후 친일내각에 반대하여 의병장으로서 이 곳에 의병 총본부를 두고, 제천, 충주의 곳곳에서 항일 투쟁을 하였슴. 장-담²(長潭)【못】공전 동남쪽에 있는 긴 못. 장자두기【골】식개 서쪽에 있는 골짜기. 백운면 애련리 장자더기 위가 됨. 재궁-골【마을】원공전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재궁이 있었슴. 절텃-골[사대동]【마을】소시랑이 북쪽에 있는 마을. 서쪽에 공전사터가 있슴. 한-티【고개】→ 백운면 애련리의 ‘한티’ 화동강목판목【기념물】자양영당 안에 소장되어 있는 판목으로 삼강오륜에 대한 예의와풍습을 백성들에게 계몽하기 위하여 편찬한책의 판목으로 총3,300여매로 되어 있었다하나 하였다 함. 현재는 1,578매만 보존되어 있음. 유형문화재 제37호로 1976. 12. 21지정되었음.

구곡리(九曲里)

[굴골,굴곡,구곡]【리】본래 제천군 근좌면(近左面)의 지역으로서, 꾸불꾸불한 골짜기가 되므로 굴골 또는 굴곡(屈曲), 변하여 구곡(九曲)이라 하다가, 상굴곡(上屈谷)과 하굴곡(下屈谷)의 두 마을로 나뉘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굴단리(屈坦里)를 병합하여 구곡리리 해서 1920년 9월에 봉양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堤原郡) 봉양면(鳳陽面) 구곡리(九曲里)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구곡리(九谷里)가 됨. 구-곡(九曲)【마을】→ 구곡리. 굴-곡(屈谷)【마을】→ 구곡리. 굴-골【마을】→구곡리. 굴단-리【마을】→ 굴탄리. 굴탄-리[굴단리](屈坦里)【마을】구곡 서쪽 후미에 있는 마을. 밋밋-재【고개】→ 공전리의 ‘밋밋재’ 상-구곡(上九曲)【마을】→ 상굴골. 상-굴골[상구곡]【마을】굴골의 위쪽에 있는 마을. 성덕원【절】구곡리에 있는 절 요-곡(要谷, 饒谷) 【마을】→ 욧골. 욧-골[요곡]【마을】하굴골 북쪽에 있는 마을. 예부터 좋은 논이 많으므로 주민들이 넉넉하게 삶. 장선-고개(長善-)【고개】상굴곡 남쪽에서 청풍면(청풍면) 장선리(장선리)로 가는 고개. 하-구곡(下九曲)【마을】→ 하굴골. 하-굴골(下九谷)[하구곡]【마을】굴골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

구학리(九鶴里)

[구학, 구학동]【리】본내 제천군 근우면(近右面)의 지역으로서, 구학산(九鶴山0의 아래가 되므로 구학동(九鶴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동점리(銅店里)를 병합하여 구학리라 해서 1920년 9월에 봉양면(鳳陽面)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堤原郡) 봉양면 (鳳陽面)구학리(九鶴里)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구학리(九鶴里)가 됨. 갈-골[노동]【마을】통점 서쪽에 있는 마을. 전에 갈대가 많았음. 갈골-재【고개】 갈골 서남쪽에서 배론으로 가는 고개. 구학(九鶴)【마을】→ 구학리. 구학-교(九鶴橋)[구학다리]【다리】통점 북쪽에 있는 다리. 1949년에 놓았는데, 6.25 사변 때 파괴되어 다시 놓았음. 길이 20m, 너비 6m. 구학-동(九鶴洞)【마을】→ 구학리. 구학-역(九鶴驛)【마을】구학 남쪽에 있는 기차역. 중앙선 개통에 따라 세움. 궁-꼴[궁동]【마을】갈골 북쪽 구렁에 있는 마을. 궁-동(弓洞)【마을】→ 굴꼴. 노-동(?洞)【마을】→ 갈골. 노쟁이-고개【고개】조백석골 북쪽에서 옥전리 노쟁이로 가는 고개. 대-암(岱岩)【바위】용대암 북쪽 냇가에 있는 바위. 깊이 패인 곳이 되어 바위위에 자루룰 놓으면 고기가 저절로 들어오므로 쉽게 잡을 수 있다 함. 덕령-산(德岺山)【산】배론산 동남쪽에 있는 산. 동-점(銅店)【마을】→ 통점. 매내밋-재【고개】배론 남쪽에서 연박리로 가는 고개. 박달나뭇-골【골】배론 위에 있는 골짜기. 전에 박달나무가 많았음. 배-론[주론]【마을】갈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 주유산 아래가 됨. 배론-산[주유산]【산】배론 위쪽에 있는 산. 배론성지【사적】천주교 전래당시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하여 숨어 지내던 곳으로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공동체를 이루었고, 황사영 백서가 이곳에서 작성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기도 함. 또한 최양업신부를 비롯한 천주교에 공헌한 분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이 있는 곳. 천주교의 성지로서 2001년 3월 2일 충청북도 지정문화재로 기념물 제117호로 지정됨. 배론신학교【사적】배론 성지내에 있는 신학교 터.1855년 매스트르 신부에 의하여 사제양성을 위하여 세워진 서양식 대학. 우리나라 최초의 공인된 근대적 교육기관임. 불당-꼴【골】갈골 위에 있는 골짜기. 불당이 있었슴. 신부-비(神父碑)【비】배론에 있는 천주교의 한국인 두 번째 신부로 양업(良業) 최정구(崔鼎九)의 비. 초대 신부인 김대건과 함께 중국 마카오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충청, 전라, 강원, 경기, 황해도의 곳곳에서 12년동안 포교하다가, 1861년 40세에 순교하였는데, 1942년 12월에 제천 군민의 주선으로 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찬양함. 신학교-터(神學校-)【터】 배론 동북쪽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대학인 신학교 터. 조선 철종(哲宗) 7년(1856) 3월에 천주교의 박해를 무릅쓰고 불란서의 신부 베르누, 부르띠, 다불뤼, 메스뜨르가 이 곳에 와서 옹기 굽기에 종사하면서 신학교를 세우고 6명의 학생을 가르쳤는데, 그 뒤 신부들은 모두 처형당하였으며, 1866년에 신학교는 폐쇄됨. 어약정 터(魚躍亭-)【터】구학리에 있는 정자 터. 옥호(玉壺 홍설모(洪設謀)가 창건하여 그의 호를 따서 옥호정(玉壺亭)이라 하였다가, 그 뒤 헐어진 것을 1940년 면장 한진학(韓鎭學)이 다시 세워 어약정이라 하였는데, 그 뒤 면장 박이양(朴怡陽)과 허담(許談)이 중수하였으나 1958년에 허물어짐. 옥호정(玉壺亭)【터】→ 어약정 터(魚躍亭-) 용-소(龍沼)【소】탁사정 아래에 있는 깊은 소. 용이 등천하였다 함. 용대-암(龍帶岩)【마을】궁골 북쪽에 있는 마을. 용소와 대암이 있음. 유송-골【골】배론에 있는 골짜기. 절-골【절】절골 위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음. 점-말[점골]【마을】배론 동북쪽에 있는 마을. 옹기점이 있었음. 조선 순조(純祖) 원년(1801)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도 황사영(黃嗣永)이 교난(敎難)을 피하여 이 곳에 와서 토굴 속에 숨어 있으면서, 위기에 놓인 조선 교회를 구출할 방법으로 교회의 박해 실정을 자세히 적고, 구원을 청하는 글을 가로cm, 세로9cm의 비단에 1줄에 110자씩 121줄 13,000여 자를 적어서 황심(黃心)과 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에 끼워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 하였으나, 백서(帛書)가 관헌에게 발각 되어, 황사영이 그 해 9월 29일에 잡혀 11월 5일 에 처형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이 문제가 국제적으로 심각하게 됨을 염려하여 사건의 변명책으로서 백서의 불리한 대목은 모두 고쳐 명주비단에 다시 써서, 동지사 겸 진주사(陳奏使)로 하여금 북경 청제(淸帝)에게 보고하여 양해를 구하였으며, 백서 원본은 의금부의 창고 속에 보관하다가 갑오경장 뒤 발견되어 조선 교회의 주교 뮈뗄(Mutel)이 가지게 되었는데,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조선교회 79명의 시복식을 할 때, 로마 교황에게 주어 현재 로마 교황청에서 보관하고 있음. 조백석-골【마을】배론 서쪽에 있는 마을. 조 농사를 백석한 부자가 살았다 함. 주-론(舟論)【마을】→ 배론. 탁사정(濯沙亭)[팔송정]【정】궁골 동쪽 냇가에 있는 정자. 조선 명종(明宗) 19년 (1568) 제주 수사(濟州水使)로 있던 임응룡(任應龍)이 고향에 돌앙올 때 해송 여덟 그루를 얻 어 와서 이 곳에 심고 팔송이라 하였으며, 그 뒤 그의 아들 희운(希雲)이 정자을 짓고 팔송정(八松亭)이라 하였는데, 그 뒤 오래되어 헐어진 것을 1925년 그의 후손 윤근(潤根)이 다시 세웠고, 옥파(玉波) 원규상(元奎常)이 ‘청사탁영 탁사탁족(淸斯濯纓 濯斯濯足)’ 의 글귀에서 따서 탁사정이라 함. 팔송은 모두 쓰러지고 송석정 위에 한 그루가 남아 있으며, 반석이 깔린 위로 폭포수가 떨어지고, 아래로 깊은 소를 이루어 경치가 매우 아름다움. 통-점[동점]【마을】구학리 동쪽에 있는 마을. 통점이 있었다 함. 통점-들【들】통점 앞에 있는 들. 파랑-재【고개】조백석골 서쪽에서 백운면으로 가는 높은 재. 팔송-정(八松亭)정【정】→ 탁사정.

마곡리(馬谷里)

[마실,마곡] 【리】본래 제천군(堤川郡) 근좌면(近左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라 하여 마실 또는 마곡리(馬谷里)라 하다가, 음지마곡(陰地馬谷)의 두 마을로 나뉘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두 마을을 병합하여 다시 마곡리라 하고 ,1920년 9월 봉양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으로 인하여 제원군 봉양면 마곡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마곡리(馬谷里)가 됨. 높은 터【마을】은비말 동쪽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 독가맛-골【마을】음지말 위에 있는 마을. 지형이 가마처럼 생겼다 함. 마-곡(馬谷)【마을】→ 마곡리. 마-실【마을】→ 마곡리. 마장간【마을】마곡리에 있는 마을. 세거리-고개【고개】양지말 동쪽에서 세거리로 가는 고개. 솔치-고개【고개】양지말 동쪽에서 삼거리 솔치로 가는 고개. 솔티-고개【마을】→ 솔치고개. 양-마곡(陽馬谷)【마을】→ 양지말. 양지-마곡(陽地馬谷)【마을】→ 양지말. 양지-마실【마을】→ 양지말. 양지-말[양지마실, 양지마곡, 양마곡]【마을】마곡리 북쪽 양지에 있는 마을. 음-마곡(陰馬谷)【마을】→ 음지말. 음지-마곡(陰地馬谷)【마을】→ 음지말. 음지-마실【마을】→ 음지말. 음지-말[음지마실, 음지마곡, 음마곡]【마을】마곡리 남쪽 음지에 있는 마을. 칼-바우【바위】 독가맛골 아래에 있는 바위. 칼처럼 뾰족하게 생김.

명도리(明道里)

[명둔이, 큰명둔이, 명도]【리】본래 제천군 근우면(近右면)의 지역으로서, 명둔이, 명도(明道0, 또는 큰명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도비동을 명도리라 하고, 1920년 9월에 봉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명도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명도리(明道里)가 됨. 도비-동(道斐洞)【마을】→ 되비골. 되비-골[도비동]【마을】명둔이 서쪽에 있는 마을. 되비라는 사람이 살았다 함. 마장-벌(馬場-)【마을】도비골 북쪽에 있는 마을. 이 곳 꼴이 풀이 좋아서 말을 놓아 멱였다 함. 매-꼴[매곡동]【마을】작은명둔이 동북쪽에 있는 마을. 매곡-동(梅谷洞)【마을】매꼴. 명도(明道)【마을】→ 명둔이. 명둔이【마을】→ 명도리. 미-실(美實)【마을】→ 작은명둔이. 작은-명둔이【마을】명둔이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 미당리 옆이 되어 미실이라고도 함. 큰-명둔이【마을】→ 명도리.

명암리(明岩里)

[명암]【마을】본래 제천군 근우면(近右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횡티리(橫峙里0와 직티리(直峙里)를 병합하여, 바위로 된 일출봉(日出峰)과 월출봉(月出峰)의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자하여 명암(明岩)리라 하고, 1920년 9월에 봉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명암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명암리(明岩里)가 됨. 가막-재【고개】요붓골에서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로 가는 재. 감암-사 (紺岩寺)【절】→ 백련사. 구대-동(舊垈洞)【마을】→ 헌텃골. 구세-정(救世井)【마을】→ 온수탕. 구양-천(九羊泉)【마을】→ 온수탕. 금수탕(金水湯)【약물】→ 요붓골 동북쪽에 있는 약수. 월출봉의 석굴에서 솟아나오는데, 속병에 좋다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는다 함. 밑바닥에 금빛 나는 모래 가루가 있음. 명암(明岩)【마을】→ 명암리. 목우-너미¹[목우동]【마을】목우너미 밑에 있는 마을. 목우-너미²【고개】미럭댕이 동남쪽에 있는 고개. 지형이 소가 풀을 뜯는 것처럼 생겼다 함. 묵우-동(牧牛洞)【마을】→ 목우너미. 문-바우¹[문암동]【마을】비끼재 동쪽에 있는 마을. 문바우가 있음. 문-바우²[문암]【바위】문바우 마을에 있는 바위. 길 양쪽에 문기둥처럼 우뚝 서 있음. 문-암(門岩)【바위】→ 문바우. 문암-동(門岩洞)【마을】→문바우. 미럭-댕이¹[미륵당]【마을】명암리 남쪽에 있는 마을. 미륵당이 있음. 미럭-댕이²[미륵당]【당】미럭댕이에 있는 미륵당. 높이 2.1m. 1947년에 집을 짓고 미륵을 모심. 미륵-당(彌勒堂)¹【마을】→ 미럭댕이 미륵-당(彌勒堂)²【당】→ 미럭댕이 미륵-불【미륵】미럭댕이에 있는 높이 237㎝의 미륵불. 학계에서는 후삼국시대 이후 미륵신 앙의 재등장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 밤나뭇-골[율목동]【마을】문바우 서북쪽에 있는 마을. 밤나무가 많았다 함. 배향-대(陪向-)[백암골, 백양골]【골】요붓골 동북쪽 일출봉에 있는 골짜기. 전에 천제를 지냈다 함. 백련-사(白蓮寺)[백련암, 감악사]【절】요붓골 북쪽 감악산에 있는 절.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2년 (662)에 의상(義湘)이 백운산(白雲山) 기슭에 창건하여 효소왕(孝昭王) 원년(692)에 큰 비에 유실되고, 헌덕왕(憲德王) 11년(819)에 무착(無着)이 이 곳에 다시 세움.그 후 여러 번 고쳐 지었음. 백련-암(白蓮庵)【절】→ 백련사. 백련-지(白蓮池)【못】명암리에 있는 못. 백련이 많았다 함. 백련사-부도(白蓮寺浮屠)【고적】백련사 동남쪽에 있는 신라 헌덕왕(新羅憲德王) 때의 중 무착(無着)의 부도, 무착조사 정원석(淨圓石)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높이 18㎝의 대석위에 백암-골(白岩-)【골】→ 배향대. 백양-골(白楊-)【골】→ 배향대. 비끼-재¹[사티, 횡티]【마을】→ 비끼재 밑에 있는 마을. 비끼-재²[사티, 횡티]【고개】→ 미럭댕이 서북쪽에 있는 고개. 조선시대 원주(原州)로 가는 관행 고개. 사치(斜峙) ¹【마을】→ 비끼재. 사치(斜峙)²【고개】→ 비끼재. 수련암-터(壽蓮庵-)【터】명암리 북쪽에 있는 백련사에 딸린 암자 터. 신석(身石) 104㎝ 높이로 되어있으며 윗부분은 유두형을 하고 있다. 신흥사-터(新興寺-)【터】명암리 북쪽에 있는 감악산에 있는 절터. 염불-암(念佛岩)【바위】백련사 어귀에 있는 바위. 바위 위에 ‘阿彌陀佛’ 넉자가 새겨져 있음. 오효자-비(吳孝子碑)【비】명암리에 있는 오 진호(吳鎭鎬)의 효자비. 왕도-터(王都-)【골】헌텃골 위 월출봉밑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어느 왕이 피난했었다 함 요부-동(要富洞,饒富洞)【마을】→ 요붓골. 용마음수-지(龍馬飮水池)【못】 요붓골 북쪽 감악산의 옛 석성안에 있는 못. 옛날에 말을 먹였었다 함. 율목-동(栗木洞)【마을】→ 밤나뭇골. 은수-탕(銀水湯)[수세정, 구양천]【우물】백련사 삼성각 아래에 있는 샘. 밑바닥에 은빛 나는 모래가루가 있음. 가뭄에 기우제를 지냄. 은적암-터(隱寂庵-)【터】백련사에 딸린 절터. 장수암-터(長壽庵-)【마을】백련사에 딸린 절터. 직-티(稷峙)【고개】→ 피재. 직티리(稷峙里)【마을】→ 피재. 피-재¹[직티리, 피방터]【마을】 피재 밑에 있는 마을. 피-재²[직티]【고개】미럭댕이 동쪽에서 제천시 모산리로 가는 고개. 피방-터【마을】→ 피재. 헌덕-동(憲德洞)【마을】→ 헌텃골. 헌텃-골[구대동. 헌덕동]【마을】 피재 북쪽에 마을. 감악산성(紺岳山城) 밑으로 옛 집터가 있었음. 황가덕이[황계덕]【마을】피재 동북쪽에 있는 마을. 금계포란혈(金鷄抱卵穴)이 있다 함. 황간원-교(黃澗院橋)【다리】 황가원터에 있는 다리. 황간원-터(黃澗院-)【터】 미럭댕이에 있는 조선 시대의 원 집터. 황계덕(黃鷄德)【마을】→ 황가덕이. 횡티(橫峙)¹【마을】→ 비끼재. 횡티(橫峙)²【고개】→ 비끼재.

미당리(美堂里)

[미당]【리】 본래 제천군 근우면(近右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대미론리(大美論里)와 옹당리(翁堂里)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대미론과 옹당의 이름을 따서 미당리(美堂里)라 하고, 1920년 6월에 봉양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으로 인하하여 제원군 봉양면 미당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미당리(美堂里)가 됨. 1999년 경희아파트 건립으로 인하여 미당리 행정구를 6개리로 분구함. 대미론이(大美論-【마을】 미당 서남쪽에 있는 마을. 도-현(陶峴)【마을】→ 질고개. 미당【마을】→미당리. 미당(美堂)【바위】→ 미당리. 미당경희아파트【마을】합자회사 경희종합건설에 아파트 4개동 495세대를 건립하여 1998년 8월 입주함. 백-곡(白谷)【마을】→ 백골. 백곡-사(白谷寺)【절】백골에 있는 절. 백-골[백곡]【마을】옹댕이 북쪽에 있는 마을. 백골-제방【뚝】 백골 어귀에 있는 뚝. 1949년에 쌓음. 부처-목【고개】 미당리에 있는 고개. 전에 절이 있었음. 옹당(翁堂)【마을】→ 옹댕이. 옹댕이[옹당]대미론 동북쪽에 있는 마을. 용화정사【절】미당리에 있는 절. 질-고개[도현]【마을】 제천시 신월리로 가는 고개.

봉양리(鳳陽里)

[봉양]【리】 본래 제천군 근우면(近右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내소리(內少里), 외소리(外少里), 오산리(梧山里)를 병합하여, 봉황산(鳳凰山) 남쪽이 되므로 봉양리라 하고. 1920년 9월에 봉양면에 펀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봉양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봉양리(鳳陽里)가 됨. 국화-실[외소리]【마을】 소리 바깥쪽에 있는 마을. 내-소리(內少里)【마을】→ 안골. 동-막(東幕)【마을】→ 국화실 북쪽에 있는 마을. 봉양(鳳陽)【마을】→ 봉양리. 봉황-산(鳳凰山)【산】 봉양 위에 있는 산. 산세가 순하고 아름 다웠으나. 길을 내기 위하여 헐었음. 소당-리(少堂里)【마을】→ 소리. 소당-부곡(少堂部曲)【마을】→ 소리. 소당이-들[소당평]【들】→ 소리에 있는 들 소당-평(少堂坪)【들】→ 소당이들. 소리[소탕리, 소당리, 소당부곡]【마을】봉양 동남쪽에 있는 마 을. 옛 지방 하급 행정구획의 하나인 부곡이 있었음. 소탕-리(少湯里)【마을】→ 소리. 송석교(松石橋)【다리】송석정 입구의 다리. 송석정 복원 때 놓음. 송석-정(松石亭)【나무】국화실 동쪽 냇가에 있는 소나무. 조선 명종(明宗) 때 제주 목사 임응룡(濟州 牧使 任應龍)이 제주에서 가져온 해송(海松) 여덟 그루를 옮겨 심고 팔송정이라 하였는데, 일곱 그루는 죽고 한 그루만 남았던 것을 송석정 복원 때 16 그루를 더 심음. 송석-정(松石亭)【정자】제천천과 팔송천이 합수되는 소 위에 해질 무렵 고기잡는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며 깎아지른 듯 서 있는 석벽위에 솔숲 사이로 둘러싸인 송석정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살던 이석조(李錫兆)의 보고에 의하여 석벽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하고 2001년 4월 27일 정자를 복원함. 안경-다리【철교】 오미 동쪽에 있는 중앙선 철로, 콩크리트로 안경형의 다리를 놓아 그 위로 철로를 설치 하였음. 안꼴[내소리]【마을】소리 안쪽에 있는 마을. 오미¹[오산]【마을】 오미 밑에 있는 마을. 오미²[오산]【산】국화실 서남쪽 들 가운데에 있는 산. 오-산¹(梧山)【마을】→ 오미. 오-산²(梧山)【산】→ 오미 외-소리(外少里)【마을】→ 국화실. 창록-계(蒼綠溪)【마을】안골 북쪽에 있는 마을. 앞에 맑은 내가 흐르고 뒷산에는 수목이 울창함. 팔송-교(八松橋)【다리】봉양리와 팔송리를 연결하는 다리. 팔송리의 ‘팔송교’

삼거리(三巨里)

[세거리]【리】본래 제천군 근좌면(近左面)의 지역으로서, 옛 청풍(淸風), 제천(堤川), 박달재로 가는 세 갈림길이 되므로 세거리 또는 삼거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답동리(沓洞里)와 송티리(松峙里)를 병합하여 다시 삼거리라 하고, 1920년 9월에 봉양면에 편입됨. 1980년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삼거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섬거리(三巨里)가 됨. 갈-경이【마을】→ 갈경지. 갈-경지[갈경이]【마을】 세거리 동쪽에 있는 마을. 갈이 많았다 함. 논-꼴[답동]【마을】 세거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 논이 많았다 함. 답-동(沓洞)【마을】→ 논꼴. 두모-곡(豆毛谷)【골】→ 두무실. 두모곡-산(豆毛谷山)【산】무모곡 위에 있는 산. 두무-곡(豆舞谷)【마을】→ 두무실. 두무-실[두무곡, 두목곡]【마을】갈경지 동북쪽에 있는 마을. 성-산(城山)【산】→ 성재. 상-안【골】→ 재비골. 성-재[성산, 재비랑산]【산】 두무실 북쪽에 있는 산. 높이 502m. 산 위에 재비랑 성터가 있는데 옛날에 재비왕(齋非王)이 성을 쌓고 피란을 하였다 함. 세-거리【마을】→ 삼거리. 솔-티¹[송티]【마을】솔티 아래에 있는 마을. 솔-티²[송티]【고개】세거리 남쪽에서 금성면(錦城面) 사곡리(社谷里)로 가는 고개. 소나무가 많았다 함. 송-티¹(松峙)【마을】→ 솔티 송-티²(松峙)【고개】→ 솔티 재비-골[성안, 재비랑이]【골】 재비랑이 안쪽에 있는 골짜기. 재비랑(齋非郞)【마을】→ 재비랑이. 재비랑-산【산】→ 성재. 재비랑 성터(齋非郞城-)【터】 성재에 있는 옛 재비랑 성의 터. 재비랑이¹齋非郞-)[재비랑, 재비래이]【마을】재비골 아래에 있 는 마을. 재비랑이²(齋非郞-)【골】→ 재비골. 재비래이【마을】→ 재비랑이.

연박리(硯朴里)

[벼루박달, 연박]【리】 본래 제천군 근좌면(近左面)의 지역으로서, 박달재로 가는 벼랑길이므로 벼루박달 또는 연박리(硯朴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대리(新垈里), 오전리(五錢里), 오리동(五里洞)을 병합하여 다시 연박리라 하고, 1920년 9월에 봉양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연박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연박리(硯朴里)가 됨. 거릿-담[주막거리]【마을】 벼루박달 동쪽 길가에 있는 마을. 주 막이 있었음. 거북-바우【바위】 유선암 앞 물 가운데 있는 바위. 고-대(高垈)【골】 노픈터. 골-안【마을】벼루박달 동쪽 산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교곡-동(橋谷洞)【마을】→ 다리목. 너메-닷돈【골】 닷돈 너머에 있는 골짜기. 노픈-터 [고대]【골】 송수골 북쪽 높은 지대에 있는 골짜기. 다랑-고개[다랑티]【고개】 오리동 남쪽에서 구곡리로 가는 고개, 굽이가 많음. 다랑-티(多郞峙)【고개】→ 다랑고개. 다리-마을【마을】 다리목. 다리-목[다리마을, 교곡동]【마을】 주포교 옆에 있는 마을. 답둔(沓屯)【마을】→ 닷돈이. 닷돈【마을】→ 닷돈이. 닷돈이[닷돈, 답둔, 오전]【마을】 벼루박달 동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닷 돈을 주고 얻은 명당이 있었다 함. 도장-곡(道藏谷)【마을】→ 도장골. 도장골[도장곡]【마을】 닷돈이 동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도 장처럼 깊숙하고 아늑함. 독-바우¹【바위】→ 봉바우. 독-바우²【들】 독바우 앞에 있는 들. 마당-바우【바위】 용바우 아래에 있는 바위. 넓고 편편함. 박달넘이-고개 [박달재]【고개】벼루박달 서쪽에서 공전리로 가는 고개. 박달한우마을【산업】2000년에 건립한 송수골 입구에 있는 축산물종합처리장. 박달-재【고개】→ 박달넘이고개. 벼루-박달【마을】→ 연박리. 봉-바우[봉암, 독바우]【바위】 벼루박달 어귀 냇물 가에 있는 바위, ① 벼루박달에 살던 김경수의 꿈에 이 바위 앞에 병아리가 모여 놀더니 갑자기 병아리가 봉이 되어 날아갔다 함. ②모양이 독처럼 생겼다 하여 독바우라고도 함. 봉-암(鳳岩)【바위】→ 봉바우. 새-둑[신고동]【마을】 벼루박달 동남쪽 둔덕에 새로 된 마을. 송수-골[송수동]【마을】숲담 서쪽에 있는 마을. 소나무가 울창하였음. 송수-동(松樹洞)【마을】→ 송수골. 숲-담[신대리]【마을】 벼루박달 북쪽에 있는 마을. 숲이 울창하였다 함. 신고-동(新皐洞)【마을】→ 새둑. 신대-리(新垈里)【마을】→ 숲담. 신주-바우【바위】→ 벼루박달 서남쪽에 있는 바위. 어느 난리 때 이 바위 밑에다 신주(神主)를 감춰두고 피난하였다 함. 연박(硯朴)【마을】→ 연박리. 오리-동(五里洞)【마을】→ 오릿골. 오릿-골[오리동]【마을】 도장골 남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오-전(五錢)【마을】→ 닷돈. 왁새-매가【고개】→ 도장골 북쪽에서 주포리로 가는 고개. 지형이 왁새(왜가리)처럼 생겼다 함. 용-바우 [용암]【바위】 새둑 남쪽 냇물 가에 있는 바위, 모양이 새처럼 생겼는데, 영검하다 하여 기우제를 지내며, 아이를 바라는 부인들이 음식을 차려 놓고 빌기도 함. 용-암(龍岩)【바위】→ 용바우. 원-연박(元硯朴)【마을】 연박리의 원 마을. 유선-암(遊仙岩)【바위】 벼루박달 앞 냇물 가에 있는 바위. 위가 넓고 편펀하여 놀기에 좋으며, 밑으로는 냇물이 흐름. 장잣-벌【버덩】 용바우 앞에 있는 버덩. 장자가 살았었다 함. 주막-거리【바위】→ 거릿담. 주포-교(周浦橋)【다리】→ 주포리의 ‘주포교’ 파병-암(破甁岩)【바위】 다리목 남쪽 냇가에 있는 바위. 울퉁불퉁하여 병을 깨뜨려 놓은 것 같다 함.

옥전리(玉田里)

[옥밭, 옥전]【리】본래 제천군 근우면(近右面)의 지역으로서, 옥밭 또는 옥전(玉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노목리(老木里)을 병합하여 옥전리라 하고 1920년 9월봉양면에 편입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옥전리로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옥전리(玉田里)가 됨. 노목-(老木里)【마을】 노쟁이 서북쪽에 있는 마을. 노장(老長)【마을】→ 노쟁이. 노쟁이[노장, 노정]【마을】 탑골 서북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노-정(老亭)【마을】→ 노쟁이. 대-곡(垈谷)【마을】→ 댓골. 댓-골[대곡, 죽동]【마을】탑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 대나무가 많았음. 벌대-암¹【마을】 벌대암이 있는 마을. 벌대-암²【바위】옥밭 동쪽 냇가에 있는 바위. 움푹하게 깊이 패인 곳이 되어 자루를 대어 놓으면 물고기 떼들이 몰려 다니다가 빠지게 되어 맣은 물고기를 잡음. 벌대암-폭포【폭】 벌대암 위에 있는 폭포. 높이 2m. 보덕-사(寶德寺)【절】 옥전리에 있는 절. 전에 칠층탑이 있었는데, 1928년에 대구(大邱)로 옮겼음. 옥-밭【마을】→ 옥전리. 옥-전(玉田)【마을】→ 옥전리. 옥전-교(玉田橋)【다리】옥밭 서쪽에 있는 다리. 길이 5m 1951년에 놓았음. 좌수-골[좌수동]【마을】 노목리 서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좌수를 지낸 사람이 살았다 함. 죽-동(竹洞)【마을】→ 댓골. 탑-거리【마을】→ 탑골. 탑-골[탑동, 탑거리, 탑평]【마을】 옥밭 서쪽에 있는 마을. 돌탑이 있었음. 탑-동(塔洞)【마을】→ 탑골. 탑-평(塔坪)【마을】→ 탑골. 학수-골【골】→ 옥전리에 있는 골짜기. 황철-암(黃鐵岩)【마을】노쟁이 동쪽에 있는 마을. 황철이 났었다 함. 황학-사(黃鶴寺)【절】 학수골에 있는 절.

원박리(院朴里)

[원박]【리】 본래 제천군 근좌면(近左面)의 지역으로서, 박달현(朴達峴)의 이름을 따서 원박(院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삼성동(三省洞)을 병합하여 원박리라 하고, 1920년 9월 봉양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으로 인하여 제원군 봉양면 원박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원박리(院朴里)가 됨. 고-암(鼓岩)【바위】→ 북바우. 고암-사(鼓岩寺)【절】안골에 있는 절. 고암 밑이 됨. 덕-고개¹[덕현]【마을】→ 덕고개 밑에 있는 마을. 덕-고개²[덕현]【고개】→ 승지골에 있는 고개. 덕-현(德峴)¹【마을】→ 덕고개. 덕-현(德峴)²【고개】→ 덕고개. 박달-령(朴達嶺)【고개】→ 박달재. 박달재터널 [박달령터널, 박달현터널]【터널】봉양과 백운을 연결하는 38번국도 상의 박달재터널. 1960m. 박달원-터(朴達院-)【터】→ 박달재에 있는 터. 조선 시대 원집 박달원이 있었음. 박달-재 [박달령], (朴達峴)【고개】섶밭 서북쪽 백운면과의 경계에 있는 높은 고개. 높이 457m. 고려(高麗) 22대 고종(高宗) 4년(1217) 7월에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거란병을 크게 쳐부순 곳으로 유명하며, 밑에는 공전사(公田寺)와 원집 박달원이 있었음. 박달현(朴達峴)【고개】→ 박달재. 북-바우[고암]【바위】섶밭 뒤에 있는 바위. 삼성-골[삼성동]【마을】 원박 남쪽에 있는 마을. 승지골 밑이 됨. 삼성-동(參星洞)【마을】→ 삼성골. 섶-밭[섶밭듸, 신전, 신전도]【마을】 원박 서쪽에 있는 마을. 섶나무가 많았음. 섶밭듸【마을】→ 섶밭. 승지-골【골】→ 삼성동 너머에 있는 골짜기. 승지가 날 명당이 있다 함. 신-전(薪田)【마을】→ 섶밭. 신전도(薪田道)【마을】→ 섶밭. 안-골【골】→ 섶밭 안쪽에 있는 골짜기. 원덕-골【마을】→ 박달원 터 위에 있는 골짜기. 원박(院朴)【마을】→ 원박리. 원-원박(元院朴)【마을】→ 원박리의 원 마을. 장구-머기¹[장구목]【마을】→ 장구머기 밑에 있는 마을. 장구-머기²[장구목]【고개】→ 섶밭에서 안골로 가는 고개. 지형이 장구처럼 잘록함. 장구-목¹【마을】→ 장구머기. 장구-목²【마을】→ 장구머기. 큰-골【골】 박달재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장평리(長坪里)

[장뜰, 장평]【리】 본래 제천군 근우면(近右面)의 지역으로서, 장뜰[장평] 옆이 되므로 장뜰 또는 장평(長坪)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고모동(古母洞)을 병합하여 장평리라 하고, 1920년 9월 봉양면에 편입됨. 옛 제천 고을이 있었다 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장평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장평리(長坪里)가 됨. 거북-바위【바위】 구미 앞 논 가운데에 있는 바위. 거북 형상 으로 생겼는데, 전에 밑이 큰 내를 이루었으므로 이 바위에 앉아 낚시질을 했다 함. 고모-동(顧母洞, 古母洞)【마을】→ 구못골. 고-산(高山, 孤山)【산】→ 장뜰 남쪽에 있는 산. 고산-동(高山洞)【마을】→ 고산적골. 고산사 터【터】→ 고산절 터. 고산잣-골【마을】→ 고산적골. 고산적-골[고산동, 고산잣골]【마을】 고산 밑에 있는 마을. 고산절이 있었음. 고산절-터[고산사터] 【터】 고산적골에 있는 고산사의 터. 구모-골【마을】→ 구못-골. 구못-골[구모골, 고모동]【마을】고산골 동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젖먹이 송아지가 어미소를 돌아보는 것처럼 생겼다 함. 구미(九美, 龜美)【마을】 새터 동쪽 구렁에 있는 마을. 구미교(九美橋)【다리】 구미와 새터 사이에 있는 다리. 능-곡(陵谷)【골】→ 능꼴. 능-꼴[능곡]【골】 장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능이 있었다 함. 대미럭-골【골】 장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덕-포(德浦)【마을】 구미 동남쪽에 있는 마을. 앞에 개가 있음. 도롱-골【골】 새터 북쪽에 있는 골짜기. 바깥-구못골【마을】 구못골 바깥쪽에 있는 마을. 보래[보례]【마을】 구못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 보례(保禮)【마을】→ 보래. 봉양-역(鳳陽驛)【역】 장평 남쪽에 있는 기차역. 중앙선 개통과 함께 세움. 이 곳에서 충북선과 중앙선이 교차됨. 봉양중학교【학교】장평리에 있는 남녀공학 중학교. 봉양초등학교 터【터】장평리에 있던 봉양초등하교는 연박리 로 이전되고. 부지는 매각되어 양조장으로 사용됨. 새-터[신대]【마을】 장뜰 동쪽에 새로 된 마을. 서제천고속도로진입로【길】구미 마을 앞에 있는 중앙고속도로 진입로, 북쪽으로 원주를 거쳐 춘천으로, 원주에서 영동고속도로 연결되고, 남쪽으로 대구로 연결됨. 1995년 원주 제천간 개통. 2001년 말 전구간 개통. 섬-논【논】 구미교 옆에 있는 논. 가운데에 바위가 있는데, 마 치 물 가운데에 있는 섬처럼 보임. 소맷-골【골】 구못골 뒤에 있는 골짜기. 꼴이 좋으므로 소를 매어 놓고 먹임. 신-대(新垈)【마을】→ 새터. 안-고못골【마을】→ 구못골 안쪽에 있는 마을. 안-산【산】장뜰 맞은편에 있는 산. 어레빗-산【산】 보래 앞에 있는 산. 봉우리가 어레빗처럼 생겼다 함. 원-장평(元長坪)【마을】 장평리의 원 마을. 윤골찰사-묘【묘】장평리에 있는 관찰사(觀察使) 윤조원(尹調元)의 무덤. 윤효자-비각(尹孝子碑閣)【비】 장뜰에 있는 효자 윤하박(尹河博)의 비각. 어릴 때 할머니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으며, 그 뒤 어머니가 앓아 눕자 백방으로 약을 썼으나 낫지 않으므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먹여 소생하게 하였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3년 시묘를 하였으므로 그 효도를 기리어 1938년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었음. 장-네미【고개】장뜰에서 왕암리 왕바우로 가는 고개. 장-뜰¹【마을】→ 장평리. 장-뜰²[장평]【들】 장뜰 앞에 있는 들. 장뜰-다리[장평교]【다리】장뜰과 고산적골 사이에 놓인 다리. 장-평(長坪)¹【마을】→ 장평리. 장-평(長坪)²【들】→ 장뜰. 장평-교(長坪橋)【다리】→ 장뜰다리. 휘치리-고개【고개】도롱골에서 봉양리 안골로 가는 고개.

주포리(周浦里)

[주포, 추포]【리】 본래 제천군 근우면(近右面)의 지역으로서, 제천시 영천동에서 오는 냇물이 삥 돌아서 흘러, 개를 이루었으므로 주포(周浦) 또는 추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다시 주포리라 하고, 1920년 9월 봉양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주포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주포리(周浦里)가 됨. 봉양읍 소재지로서 경찰파출소, 초 중 고 학교, 우체국. 농협 등의 관공서가 있음. 중앙 아파트 건립으로 인하여 1995년 주포리 행절구역 4개리로 분구함. 가창-골【마을】 주포 동쪽에 있는 마을. 창터에 있던 옛 제천현(堤川縣)의 창집을 이 곳에 옮겼었다 함. 개너밋-재【고개】→ 주폿 고개. 광-탄(廣灘)【여울】 주포 남쪽에 있는 여울. 주포천과 장평천이 합수 됨. 기너밋-고개【고개】→ 주폿 고개. 둔댓-골【골】비수리 위에 있는 골짜기. 둔덕이 짐. 말-바우【바위】주포교 밑 물가에 있는 바위. 바위 위에 자국이 나 있는데, 옛날 장수의 말 발자국이라 함. 봉양농공단지【공장】1992년 부터 대림요업, 대림이낙스, SM전자,정겨판넬공업 등 4개업체가 가동함. 비소-리(飛巢里)【마을】→ 비수리. 비수-리[비소리]【마을】가창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 물이 흐르지 않으므로 비수리(非水里)라 하였다가, 마을 위쪽 공동 묘지에 있는 큰 바위에 수리가 새끼를 치고 살았으므로 비소리로 고쳤음. 임수사-묘(任水使墓)【묘】 주포리에 있는 조선 명종(明宗) 때 제주 수사를 지낸 임응용(任應龍)의 묘. 신도비가 있음. 작은-둔댓골【골】둔댓골의 작은 골짜기. 장터-고개【고개】→ 주폿 고개. 주포(周浦)【마을】→ 주포리. 주포교(周浦橋)【다리】주포리와 연박리 경계에 있는 다리. 1923 년 10월에 놓음. 길이 100m. 주포창-터(周浦倉-)【터】→ 창터. 주폿-고개[장터고개,기너미고개,개너밋재]【고개】주포리에서 장평리로 가는 고개. 장평 사람들은 주폿고개라고 부르며, 주포사람들은 주포 장이 서므로 장터고개. 또는 윤조원(尹調元)의 산소 모양이 게가 엎드린 것처럼 생겼다 하여 기너미고개, 게너밋고개라고 함. 중앙아파트【마을】주포리 가창골에 있는 (주)중앙공영의 아파트 4개동 447세대. 1994년 12월 입주함. 창-터[주포창터]【터】 주포리 155번지 부근에 있는 터. 조선 때 제천현(堤川縣)에 딸리 창고가 있었음. 추포【마을】→ 주포리.

팔송리(八松里)

[팔송] 【리】 본래 제천군 근우면(近右面)의 지역으로서, 팔송정(八松亭)이 있었으므로 팔송(八松)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평촌(平村)과 동오리(桐梧里)를 병합하여 팔송리라 하고, 1920년 9월 봉양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팔송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팔송리(八松里)가 됨. 골-말【마을】 팔송 동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도래-미[동산저]【산】 팔송 남쪽 들 가운데에 있는 산. 봉우리 가 동그랗고 낮음. 동-산(東山)【산】 마산 동남쪽에 있는 산. 동산-벌【마을】 동산 밑 벌판에 있는 마을. 동산-저(東山底)【산】→ 도래미. 동오-리(棟梧里)【마을】→ 중봉말 동쪽에 있는 마을. 마-산(馬山)¹【마을】→ 마산 밑에 있는 마을. 마-산(馬山)²[서낭당산, 성황당산] 【산】벌말 서남쪽에 있는 산. 서낭당이 있었음. 벌-담【마을】→ 벌말. 벌-말[벌담, 평촌]【마을】팔송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 앞에 넓 은 들이 있음. 서낭당-산【산】→ 마산. 성황당-산(城隍堂山)【산】→ 마산. 송석정 터(松石亭-)【터】 벌말에 있는 정자 터. 민단암(閔丹岩)이 창건하였었다 하나, 확실히 알 수 없음. 아래 석벽에 ‘송석정(松石亭)’ 과 ‘창하조대(蒼霞釣臺)’라 새겨 있음. 제천공고【학교】팔송리에 있는 남녀공학의 공업고등학교. 중퉁-말【마을】동오리와 마사 마을 사이에 있는 마을. 팔-송(八松)【마을】→ 팔송리. 팔송-교(八松橋)【다리】→ 봉양리의 ‘팔송교’ 팔송-정(八松亭)【나무】팔송리와 구학리 경계에 있는 해송나무. 조선 명종(明宗)때 제주 목사(濟州 牧使) 임응용(任應龍)이 제주도를 떠나오면서 해송(海松) 여덟 그루를 가지고 와서 심었는데 한 그루만 남았음(구학리의 탁사정 참조) 평-촌(平村)【마을】→ 벌말. 향교-터(鄕校-)【터】→ 마산 서쪽에 있는 옛 제천현의 향교 터.

학산리(鶴山里)

[학산]【리】 본래 제천군 근우면(近右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광암리(廣岩里), 학전리(鶴田里), 산척리(山尺里)를 병합하여 학전과 산척의 이름을 따서 학산리가 됨. 1920년 9월 봉양면에 편입.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학산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堤川市) 봉양읍(鳳陽邑) 학산리(鶴山里)가 됨. 광암(廣岩)¹【마을】 광암이 있는 마을. 광암(廣岩)²【바위】 산척 북쪽에 있는 넓은 바위. 늘-목¹[어묵]【마을】늘목 밑에 있는 마을. 늘-목²【고개】늘목 동북쪽에 있는 고개. 널나무가 많았다 함. 뒷-골[후동]【마을】 광암 뒤쪽에 있는 마을. 묘-재[못재, 산척, 산척소]【마을】 학전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 옛날 지방 하급 행정기관의 하나인 소(所)가 있었음. 묫-재【마을】→ 묘재. 산사(山査)【마을】→ 산사나무골. 산사나무-거리【마을】→ 산사나뭇골. 산사나무-골[산사나무거리, 산사, 산사동]【마을】 창터 동북쪽 에 있는 마을. 산사나무가 많았음. 산사-동(山査洞)【마을】→ 산?뭇골. 산척(山尺)【마을】→ 묘재. 산척-소(山尺所)【마을】→ 묘재. 선대-동【마을】→ 선텃골. 선덕-골【마을】→ 선텃골. 선텃-골[선덕골, 선대동, 슨텃골]【마을】광암 동북쪽에 있는 마을. 슨텃-골【마을】→ 선텃골. 어목(於木)【마을】→ 늘목. 창-터【마을】묘재 서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창고가 있었다 함. 천수-암(天壽庵)【절】학산에 있는 절. 네모 난 부도가 있음. 학산(鶴山)【마을】→ 학산리. 학산-교(鶴山橋)【다리】 묘재에 있는 다리. 길이 15m. 1951년에 놓음. 학전-리(鶴田里)【마을】 학산 남쪽에 있는 마을. 구학산의 아래가 됨. 후-동(後洞)【마을】→ 뒷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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